90년대 초, 로마에서 유학하던 시절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었다. 그 시기, 로마는 ‘내 인생의 광야’였다. 딸은 어렸고, 엄마 손을 매우 필요로 했다. 같은 시기에 남편이 결핵으로 피를 토하며 병원으로 실려 가 긴 시간 투병 생활을 했다. 아직 돌이 되지 않은 딸을 맡길 곳, 내가 일할 곳이 당장 필요했다. 한 건물에 살던 이웃들은 내게 실질적인 정보를 주지 못했고, 나는 다니던 본당에 가서 주임 신부님께 부탁했다. 우선 아기를 맡길 곳이 시급하다고 청했다. 바로 그날 저녁, 본당에서 몇몇 교우가 우리집을 찾아왔다. 빈센트회 회원이라고 했다. 그들은 바티칸 박물관 앞에 있는 스페인 수녀님들이 하는 유료 탁아소를 소개해 주었다. 사설이라 꽤 비싼 비용을 내야 하는데, 내 사정을 봐서 무료로 ..
이탈리아 사람들은 노래하는 걸 참 좋아한다. 기악을 좋아하는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북부 유럽과 달리 적극적인 표현인 노래는 어쩌면 이탈리아인들의 성격을 잘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칸타레(Cantare)는 “노래하다”라는 동사다. 가끔 이탈리아인의 말하는 걸 듣다 보면, 말을 하는지 노래를 하는지 혼동할 때가 있다. 다음 글에서 말하겠지만, 언어 자체의 리듬과 발음, 그리고 선율적인 특성이 그들을 노래하는 민족으로 만든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 내가 본 이탈리아인의 칸타레 낭만1980년대 중반, 유학 생활 초기에 나는 리디아라는 할머니와 1년 6개월 정도 살았던 적이 있다. 당시 할머니의 나이는 78세였고, 나는 20대 초반이었다. 그분은 시골에 농장도 있어서, 정기적으로 가곤했고, 거기서 나오는 ..
이탈리아를 두고 흔히 만자레(mangiare, 먹다), 칸타레(cantare, 노래하다), 아마레(amare, 사랑하다)의 나라라고 한다. 먹고, 노래하고, 사랑하는 나라라는 뜻이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나의 경험내 친구 중에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 지방 출신의 신부님 한 분이 있다. 오래전 그가 사제서품을 받았을 때, 서품식과 첫 미사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었다. 토요일 저녁에 사제서품을 받고, 다음날 교중미사를 첫 미사로 봉헌하는 일정이었다. 그때 우리 딸은 어렸고, 남편과 나는 신부님 어머니의 초대에 못이기는 척하며 하룻밤 신세를 지기로 했다. 토요일 저녁에 도착했을 때, 신부님의 어머니는 성대한 만찬으로 우리의 정신을 쏙 빼 놓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전날 저녁에 먹은 게 아..
20/12/2024 작성 내가 사는 곳은 피렌체, 조베르티가(街) 3번지에 있는 “천사의 알현을 받은 성 요셉(S. Giuseppe dell’Apparizione)” 수녀원이다. 내가 이 집으로 이사 온 것은 코비드-19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2020년 겨울이었다. 도심에서 약 1.5km 떨어진 이곳은 걸어 다니기도 좋고, 교통도 좋고, 무엇보다도 우리 집이 있는 조베르티가가 “100개의 상점”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쇼핑가라 가로등이 밤늦게까지 환한, 피렌체에선 보기 드문 번화가다. 개인적으로 도심에서 혼자 원룸을 임대해서 있을 때보다 훨씬 좋다. 아래층 수녀원에는 작은 경당도 있어서, 구교 집안에서 태어난 나로선 정말 부족함이 전혀 없는 곳이다. 내가 이곳으로 이사를 결정하고, 인터뷰부터 lockdo..